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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마테르 전쟁 Mater Krieg Mater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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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83년 2월 22일 ~ 1984년 7월 15일 | |||||||||
장소 | |||||||||
북랜드 지방 | |||||||||
원인 | |||||||||
MAL기 사건, 민케 대학살에 대한 마베라의 보복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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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전력 | |||||||||
-명 | -명 | ||||||||
결과 | |||||||||
반한랜드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웨스타시아의 멸망 및 마베라로 편입 | |||||||||
피해규모 | |||||||||
1. 개요 [편집]
웨스타시아와 마베라 왕국 사이에서 1983년 2월 22일부터 이듬해 7월 15일까지 일어난 전쟁. 단 1년 7개월간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으로 웨스타시아가 멸망하고, 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편집]
2.1. 마테르는 누구인가? [편집]
2.2. 마베라: 민케 교단에 대해 [편집]
2.3. 웨스타시아: 이쪽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 [편집]
한편, 이 모든 짓들을 저지른 웨스타시아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1981년은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정책이 불러온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나라의 경제가 시궁창으로 떨어진지 3년이 채 안지난 시점이었고 이미 7대기업 3개가 도산하고 거리엔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날 정도로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2.4. MAL기 격추사건 [편집]
1982년 9월 1일, 카이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동사랜드 베젤 공항을 거쳐 마베라 트리넬 국제공항으로 이동하던 367편(기종 747-230B, 기체 등록번호 HL7442)이 웨스타시아 서부 상공에서 웨스타시아 공군에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으로 마베라 국적기가 당한 사고 중 최악의 사고 규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에는 세계 5위, 오늘날에도 세계 12위 규모의 엄청난 사고다.
2.4.1. 격추 [편집]
1982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367편은 웨스타시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는데 이때 웨스타시아 공군은 367편의 진입을 눈치챘고 마베라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367편은 웨스터시아의 영공에 진입하였지만 대응하기엔 367편이 칼펜슈타인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배치되었던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36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웨스타시아 영공을 통과하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마베라항공 367편이 다시 웨스타시아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웨스타시아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MAL367: Mabera Air 36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동사랜드관제소: East Saland Control Roger. | 36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 뒤 유지하겠습니다. 마베라항공 367편. 동사랜드관제소: 동사랜드 컨트롤, 알겠습니다. |
위 무전을 367편과 동사랜드관제소가 나눴을 때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동사랜드와 무전을 마친 367편이 고도를 35,000ft(10668m)로 올리기 시작했다. 기수를 들면서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을 앞질러가게 되었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토네이도의 조종사 괴링은 36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그리고 서로 속도가 동일한 상황에서 앞에 있는 기체가 기수를 들어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뒤에 있는 비행기가 앞 기체를 오버슛하여 앞지르게 되는데 이러면 역으로 뒤를 잡히게 되는 것이므로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자신을 따돌리려는 리버설, 즉 공수를 바꾸는 기동인 것이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전투기나 요격기는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날기 어렵다.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적도 작고 중, 고속 기동성을 중시하거나 아예 속도에 몰빵하는 설계라 민항기보다 실속속도가 훨씬 빠르다. 즉, 요격기의 조종사에게 이 행동은 전투기의 실속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행동으로 비쳤고 따라서 해당 항공기는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으로 그려진 것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꿰고 있는 군 관계자가 탑승한 모종의 군용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367편이 괴링의 토네이도를 무시(실제로는 어두운 밤에 예광탄도 없이 사격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하했다.)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서부지방 웨스타시아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367편이 웨스타시아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 데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루이나 공군의 전자정찰기인 RC-135가 웨스타시아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비행 방식[1]에 웨스타시아 공군의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367편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고도를 상승하며 오버슛을 하게 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괴링은 다시 367편의 주위를 빙 돌아 36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오전 3시 25분 무렵에 파이어스트릭 공대공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한발의 미사일은 주익의 엔진에 명중하였고 다른 한발은 기체 후방부에서 근접폭발했다. 367편은 미사일에 피격된 여파로 기체 후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고 이 충격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2] 피격 직후 367편은 잠시 38,000ft(11582m)까지 급상승하였고 이후 약 11분간 추락하며 활공하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367편이 비상상황임을 알리고 MAYDAY를 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터리다.[3] 조종사들은 피격 직후 상승하던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리는 시도도 했지만[4]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도 어려움을 느끼고 비상강하를 시작한다.
367편은 꼬리부분이 손상[5]되어 유압을 상실한 채로 주변을 강하하며 비행하다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ICAO 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괴링은 서부 해안가 근처에서 367편이 나선선회를 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367편이 최후의 순간 동안 급강하한 데다 바다는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수면을 강타한 직후 생존자가 있었을 확률은 없다. 추락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에 빌베른의 오징어잡이 어선[6] 크리스쳔 로스가 폭발을 목격했다고 한다.
한편 36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동사랜드 관제소는 다급하게 36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동사랜드 관제소는 웨스타시아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36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웨스트시아가 격추 사실을 시인하였고 부랴부랴 빌베른 해군과 루이나 해군, 마베라 해군,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심지어 웨스타시아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루,빌,마 구조대가 웨스타시아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력 추락 지점인 서부 해안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이후 사고 현장과 인접한 빌베른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체 조각을 찾았다. 한편 367편이 추락한 직후 웨스타시아는 추락지점 근해를 수색했는데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그리고 영공침범의 증거로 마베라군의 시신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RC-135가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 탄 민간 항공사의 민항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367편의 파편과 블랙박스,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원래 웨스타시아는 자기들이 민항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으나 루이나의 정보 공개로 무산되었고 루이나와 마베라의 압박 때문에 1982년 9월 26일 웨스타시아는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그러나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마테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웨스타시아는 367편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3. 경과 [편집]
3.1. 웨식트(Wexit): 비동맹노선으로 [편집]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루이나와 미합중제국을 비롯한 제1세계 국가들(특히 폴란드와 서독)은 40년전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군국주의 정권, 선전선동을 통한 지지율 강화, 민족에 대한 적대심 유발 및 혐오정치, 거기에 영토확장 야욕까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양세 아니었던가? 해협은 다시금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웨스타시아는 경제력 이슈로 결코 그리 강한나라가 아니었지만 만약 마베라가 전쟁에서 진다면 중립을 무시하는 군국주의 특성상 시스타니아, 체르드, 델라웨어 등의 랜드해협 북부 중립국들도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무너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북마베라해의 재해권[7]과 영토, 각종 희토류와 천연자원들을 한랜드가 깡으로 손에 쥐어 서방세계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채우려 NLTO 자진탈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대통령이 회장인 유진그룹은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하고,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채우려 NLTO 자진탈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대통령이 회장인 유진그룹은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하고,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3.2. 침공 후 3개월, 40년전의 악몽 [편집]
전쟁의 첫 포성은 웨스타시아가 가져갔다. 1984년 2월 22일 오전 4시 5분경, '할아버지가 살아나셨다'라는 역사적인 개전암호 발신과 함께 럭샤슨호르스트급 2번함 시후니제나우의 11.1인치급 주포의 포격을 시작으로 6,900발의 포격이 산맥 너머에 내리꽂히고, 곧이어 웨스타시아 육군 320만 대군과 보름달을 까맣게 가린 공군의 전폭기들이 일제히 에스타뉴 산맥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23일 오후 4시경, 님부스 시를 수호하던 제88사단과
제3,9,27보병사단과 제6,3,18기갑사단은 개전 날짜가 합필이면 북랜드 지방의 손꼽히는 명절인 콩콩절 전야였기 때문에, 군 기강이 한껏 해이해져 있었던 점도 한목했다.
23일 오후 4시경, 님부스 시를 수호하던 제88사단과
제3,9,27보병사단과 제6,3,18기갑사단은 개전 날짜가 합필이면 북랜드 지방의 손꼽히는 명절인 콩콩절 전야였기 때문에, 군 기강이 한껏 해이해져 있었던 점도 한목했다.
3.3. "수면위의 모든것은 웨스타시아의 적" [편집]
3.4. 그 계곡을 먹어야 한다 [편집]
3.5. 역전 [편집]
3.5.1. 체르드의 참전 [편집]
3.5.2. 해전: 봉쇄가 뚫리다 [편집]
3.5.3. 벵가지 상륙 [편집]
3.5.4. 대공세 [편집]
3.5.5. 번외: 라이넬 항 탈출 [편집]
3.6. 발악: 은색작전 [편집]
3.6.1. 칼펜슈타인 공중전, 루프트바페의 괴멸 [편집]
3.6.2. 토브룩의 참화 [편집]
3.7. 로벤자운 작전 유출과 일시휴전 [편집]
3.8. 웨스터발트까지 10km [편집]
3.9. 종막 [편집]
4. 반전: 헤이그에서 밝혀진 것 [편집]
5. 그의 행방은 어디로? [편집]
6. 이후 [편집]
[1]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제국, 중국, 소련이 서로 자주 행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의 주파수와 패턴을 수집(ELINT)할 수 있고 상대국 방공망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제국이 중국 방공망 근처에서 알짱거리거나 중국, 소련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런 일환이다.[2]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 시스템 중 승강타를 조작할 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 강하를 하던 36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3] 피격 직후 급격한 기내 감압으로 인해 저고도로 하강하겠다는 교신을 도쿄 컨트롤에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무전은 잡음이 심해 동사랜드 컨트롤에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관제사는 주파수를 확인한 뒤 다시 교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367편과의 교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4] 이때 엔진은 정상이라고 하는 녹음이 들린다.[5]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추락 과정에서 공중분해됐을 가능성도 있다.[6] 어선이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밀수품을 나르는 선박이었을 것이다.[7]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랜드해협의 해상무역은 유럽쪽으론 북쪽의 포틸락스 해협과 북마베라해로 나가고, 아시아 및 인도양 쪽으론 동남쪽의 카이삼 해로 나가는데, 이중 북마베라 해가 나라 하나에 통째로 먹힌다는건 유럽쪽 해상무역의 통제가 가능해짐과 동시에, 아래쪽 남포틸락스 해협을 먹고있는 루이나의 패권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